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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하유역 은주 청동예기 사용 집단과 기자조선

Publisher
NRF KRM(Korean Research Memory)
Publication Date

Abstract

大凌河流域에서 출토된 靑銅禮器의 여러 씨족명을 보면 殷 멸망 후 殷族들이 중국 東北地方으로 집단적으로 이동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殷族의 동북지방 이동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인정한다 해도 당시 이 일대에는 아직 夏家店下層文化 주민들이 북방계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遼西地域 초기 청동기문화는 중국학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北方系 청동기 문화라는 토착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 遼西地域에서 夏家店下層文化를 담당한 住民集團은 문헌상 그 존재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나중에 ‘戎狄’ 또는 ‘戎胡’를 형성하는 이른바 오랑캐 先祖들의 문화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가점하층문화는 燕 성립 이전의 遼寧地域 土着文化로 西周時期에 진입한 이후에도 商·周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변화를 겪기는 하였으나, 지역적 특성을 고수하고 일정한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성들을 성립시켰다. 전술한 箕族 또는 그 一支族은 西周 초기에 요서지역에 위치하면서 연후(匽:燕侯)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시 遼西地域에 거주하였으나 이후에 결코 東北方으로는 이동하지 않았으며 그와 반대쪽인 山東省 지방으로 집결하여 영주(永住)하였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시된다. 아마 大凌河流域에 定居하고 있던 殷遺들은 아마도 일시적인 변고 때문에 氏族을 상징하는 ‘永保尊彛’(전승가보)를 황급히 땅에 묻고 다시 서쪽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에서 箕子를 대표로 하는 주민집단의 존재는 인정할 수 있어도 遼西 大凌河 유역이 ‘箕子朝鮮’이었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리고 箕子朝鮮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孤竹이나 箕子集團, 令支 등은 대개 殷의 流移民이 중심이 된 집단들이었지만, 결국은 토착 戎狄 문화에 흡수되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伏生의 『尙書大傳』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周 武王이 殷을 이기자 기자가 북쪽으로 향해 朝鮮으로 갔다’는 고사는 바로 ‘箕子朝鮮’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광대한 지역에 箕侯가 존재하였고, 또 ‘商朝’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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