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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rmation of self-consciousness and its hybrid beginnings in the early modern era of Japan -Focused on the validity of 'East Asia' discourse and the de-Sinocentrism in the early modern era of Japan through the system of costume-

Publisher
NRF KRM(Korean Research Memory)
Publication Date

Abstract

구체적으로는 인접국과의 교류 속에서 접하게 된 ‘보편’인 중화의 의복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화와 다른 자신들의 고유한 의복제도를 어떻게 ‘자립’으로 규정지어 갔는지에 관해서 살펴볼 것이다. 조선과의 관계에 관해서는 이미 다룬 바가 있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중국과 류큐와의 교류에 한정하여 살피고자 한다. Ⅰ. 1년차 : 히데요시의 일본국왕의 책봉과 관복 사여에 대한 경험과 그 기억-책봉 거부설의 연변- 임진왜란의 강화 과정에서 1596년 명으로부터 히데요시에게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는 칙서와 함께 책봉에 수반되는 고명, 관복 등이 보내졌다. 히데요시가 받은 관복은 현재 교토의 묘호인에 전해지고 있으며 배하 중에는 우에스키에게 사여된 관복이 요네자와시에 있는 우에스키 신사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고다이사 등에는 히데요시가 중국의 관[唐冠]을 착용한 모습의 초상화가 여러 점 남아 있다. 히데요시가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 금인, 직첩, 관복을 사여 받은 사실은 히데요시나 임진왜란을 다룬 다양한 근세의 문헌을 통해서 널리 대중적으로 전해졌다. 이로서 중화의 관복이 이민족에게 전해지는 과정을 일본인 자신들의 정치적 현실과 관련해 각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것은 히데요시가 처음에는 명의 관복을 입었다가 책봉의 의미를 알고 벗어던졌다거나 아예 처음부터 입지 않았다는 식으로 히데요시의 책봉과 관복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윤색되어 갔다는 점이다. 히데요시가 명의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맥락의, 관복에 관한 이러한 윤색은 표현이 점차 강화되어 칙서를 찢어버렸다는 표현에 이른다. 종래 사학계에서는 임진왜란 강화에 관한 사실의 규명에 주력하다 보니 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책봉과 관련된 사실의 윤색을 ‘날조’라 치부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일본 근세의 자의식과 대외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로서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히데요시의 책봉거부설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그 ‘날조’를 언급함에 있어서 대개 칙서에 관심을 두고 관복은 부수적인 것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연변과정을 살펴보면, 본래 히데요시의 책봉거부설은 관복에 대한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적어도 17세기 중반에는 중화의 질서체계를 부정하는 책봉거부설이 히데요시가 관복을 ‘벗어버렸다’, ‘착용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통해서 성립되었다. 중국의 관복, 즉 유교적 문명성의 상징이었던 명의 관복이 자국의 현실과 관련된 경험과 그 기억 속에 그 빛이 퇴색되어 갔다. 여기에서는 근년 인문학의 화두가 되고 있는 ‘역사적 기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히데요시가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을 받고 관복을 사여받은 사실이 정치적・문화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변형되고 민중이라는 집단적 차원에서 기억되어 가는 과정을 고찰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호리 교안이나 하야시 라잔, 야마가 소코 등의 유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사상과 관련지어 고찰하고자 한다. 이 점은 주자학을 국시로 삼기 시작한 일본근세의 초기 주자학에 나타나는 일본주의적 성격의 일단을 조명하게 될 것이라 기대된다. Ⅱ. 2년차 : ‘조공’과 교착되는 ‘통신’ ─‘조공’의 복장이 되어 버린 중화의 관복─ 류큐는 명 초기에 책봉을 받고 관복을 사여받아 중화의 질서체계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1609년 사쓰마번의 시마즈씨에 의해서 무력으로 진압된 이후 사쓰마번의 부용국이 되었다. 그러나 막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막번 체제 속의 ‘이국’이라는 지위가 확정되어 중일에 양속(兩屬)된 처지가 된 채 사쓰마번에 대한 공납이 의무화되고 에도의 막부에 사절을 파견하게 되었다. 한편, 통신사가 방일했던 시기는 류큐로부터 막부로 사절이 파견된 시기와 중복된다. 이때 류큐사절이 에도에 참부할 때의 복장은 공교롭게도 통신사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근세일본에서 류큐의 관복과 조선의 관복은 서로 유기적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물론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노출되어 있었다고 이해된다. 당시의 상황만으로 본다면 근세일본에서 중화의 의복은 조공단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류큐가 중화의 관복제도를 도입하는 과정과 명청 교체 이후 중화의 관복제도를 유지하게 된 이유에 관해서 일본은 정치적 맥락에서 상세히 이해하고 있었다. 근세일본이 ‘조공단’으로서 류큐사절의 복장을 바라보는 시선과 통신사의 관복을 바라보는 시선은 착종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2년차 연구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이 점을 문헌을 통해서 규명하는 것이다. ‘조공’의 복장으로서 류큐의 관복에 관한 이해가 조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통해서 유교적 문명성을 상징하는 중화의 관복의 근세일본에 있어서 위상을 확인해 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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